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히틀러의 연설 능력 ==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에 기반하여, 나치당은 무수한 극단주의 군소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빈의 부랑아 시절에 숙소에서 동료들에게 잡설을 늘어놓으며 연마한 웅변술과 오스트리아의 정치지형을 분석하면서 보유하게 된 정치적 안목은 나치당 입당 이후 히틀러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기존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전매특허라는 인식 때문에 보수파 정치인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연설능력과 선동능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전속 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제스처를 찍고 이를 분석하여 자신의 연설과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사용,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히틀러의 역동적인 제스처는 히틀러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에도 쓰이면서도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할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호프만과 만나게 된 계기도 골때리는데 당시 인기가 많던 정치인인 히틀러는 [[신비주의]]인지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꺼려 그의 사진이 품귀 현상을 빚었고 호프만은 한 미국 언론사에서 $1,000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가 들켜서 돌격대원들한테 구타당하며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목격한 히틀러가 흥미가 동했는지 그와 대화를 나눴고, 자신의 사진 독점권을 주는 대신 사진 인세 수입의 10%를 가져가기로 합의해 그를 전속 사진사로 채용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nationalgeographic.com/flair-for-the-dramatic_44431_600x450.jpg|width=100%]]}}}|| ||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히틀러의 제스처 중 하나를 컬러로 복원한 사진. ||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혁명 같은 독일인들이 굴욕감을 느낄 상황 변화가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1919년에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어수선한 시대와 상황에서 연설 능력과 강한 표현력, 고정관념에 기댄 파괴력으로 독일이 궁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자신이 제시하는 길이며, 이는 독일이 회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라는 확신을 전달함으로써 자기와 정치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지닌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달랐다면 그런 메시지는 잘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고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를 잘 몰랐고 또 안다고 해도 툭하면 핏대나 올려대는 바이에른의 선동가 정도로나 알았던 일반 독일 국민은 말할 나위도 없고 뮌헨 시민의 압도적 다수도 1920년대 초반에는 그런 의견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과 장소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 히틀러의 메시지는 뮌헨의 술집에 모인 떠들썩한 사람들의 억눌릴 대로 억눌린 노여움과 두려움, 좌절, 울분, 적개심을 정확히 건드렸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히틀러의 연설이 먹혀들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설자가 워낙 확신에 차 있었던 데다가 독일의 문제에 대해 내린 진단과 처방이 모두 단순 명쾌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처음에 남다른 혹은 독특한 정치 사상을 지닌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퍼뜨린 생각은 새롭거나 색다르지도, 남다르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저런 민족주의 진영이나 정파에서 익히 알려진 내용이었고 또 전쟁 전에 이미 범게르만주의 진영에서 그 핵심을 상당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내용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내용들을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포심과 편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부추겼다. 히틀러는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독창적으로 선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히틀러는 발표하는 요령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연설을 통해 인상을 남기는 법을 의식적으로 배웠다. 효율적으로 선전을 하고 희생양을 만들어서 선동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도 배웠다. 실제로 자신이 대중을 동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대중 동원술은 히틀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다. 다른 길은 없고 오직 자기 방법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만드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신을 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맥주홀에 모인 사람들, 나중에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이 보인 반응은 다른 자리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확신과 자신감, 뿌듯함을 히틀러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독일 민족은 남다르고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했는데 정도가 훨씬 심하기는 했지만, 히틀러의 국수주의는 바로 그런 토양에서 자랄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서민들이 느끼는 공포와 울분과 고정관념을 당대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대변했고, 더 나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심어주었다. 더구나 그 사회는 진정한 독일의 가치가 살아 있는, 독일 국민에게 더없이 편하게 다가오는 그런 사회였다. 히틀러에게 사람들이 빨려든 또 하나의 이유는 미래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과거]]를 규탄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내용의 [[시온장로회 수칙]]이라는 위서가 나돌아서 반유대주의 진영에서 널리 읽혔는데, 그 책도 히틀러가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히틀러의 세계관 안에서 반유대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하나로 묶는 촉매제 역할을 했고, 이렇게 해서 한번 만들어진 고정 관념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없어지지 않았다. 분열과 불화를 막으려면 모든 정열을 하나에 쏟아 붓고 오직 하나의 적만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자고로 위대한 지도자는 대중의 관심을 오직 하나의 적에 묶어 둘 줄 아는 사람"이라고 히틀러는 선언했다. 당시 독일 내에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은 1933년 기준으로 독일에 0.76%밖에 없었다. 세상이 각박할 때는 이렇게 얼마 안되는 소수 집단이 기업과 예술, 전문직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들에 대한 시기심과 적개심을 부추기기가 너무나도 쉬웠다. 히틀러 연설의 핵심은 단순과 반복이었다. 군중의 민족 의식을 일깨운다, 1918년의 [[배후중상설|엄청난 배신]]을 뒤엎는다, 독일 내부의 적과 특히 유대인을 제거한다, 독일 영토 밖에서 힘을 겨루어 세계 열강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새롭게 다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1919년과 1920년에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러 몰려든 군중둘은 세련된 이론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분노와 원한, 증오의 불길을 피울 수 있는 간단한 구호만 있으면 충분했다. 이 즈음의 히틀러는 스스로를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얻은 뒤에도 선전·선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후 나치당의 성공을 보며 서서히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권력욕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이 곧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게 된다. 히틀러는 나치당 초기 당재정이 빈약할 때는, 자기의 연설을 들으러 오는 청중들에게 광고를 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니까 한창 신나게 자기의 정견을 늘어놓은 다음에, 상품홍보활동이나 광고를 하고, 업체의 돈을 받은 것이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집회에서 들어온 연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의 연설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베르사유 조약]]처럼 당시 사람 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를 잡아서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독일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유일한 활로는 무엇인가? 사이사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두 시간 반을 내리 연설했지만 더 길게 해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구절절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독일이 직면한 공포도, 고통도, 절망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망가진 민족에게 유일하게 남은 활로가 무엇인지를 역사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용기, 믿음, 행동력, 근면성, 위대하고 찬란한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장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새 출발의 다짐이었다. 그날 저녁 이후로,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나는 독일의 운명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히틀러뿐이라고 확신했다.” >---- >히틀러 1권 5장 맥주홀 선동가(239~240쪽), 한스 프랑크의 증언 >히틀러는 누가 뭐래도 일급 배우였다. 청중이 빽빽이 들어찬 집회장에 일부러 늦게 나타나는 것이나 철저하게 계산된 연설, 다채로운 어휘 선택, 화려한 손짓과 몸짓까지 이 모두가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갈고 닦은 연기력은 타고난 말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낮은 소리로,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감미롭지는 않았지만 변화와 리듬이 있었고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쳤다. 문장을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다가는 적당한 대목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핵심을 강조했다. 연설이 점점 달아오르면 손동작도 활발해졌고 적에 대한 신랄한 야유도 터져 나왔다. 1927년과 1929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아주 세부적인 데까지 신경을 쓰면서까지 히틀러는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는 데 집착했다. 옷도 그때그때 모임의 성격에 맞게 입었다. 열성 지지자들이 모여드는 대규모 당 행사나 집회장에서는 [[하켄크로이츠]] 무늬가 팔뚝에 새겨진 연고동색 제복에 오른쪽 어깨에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면서 내려오는 가죽띠를 매고 무릎가지 올라오는 가죽 군화를 신었다. 일반 청중을 상대할 때는 전투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점잖은 느낌을 주기 위해 검은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 >히틀러 1권 (p. 412~414)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득세 이후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이 독일에 스파이를 심었는데, 그 스파이가 ''''그의 연설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고 보고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투리]]([[오스트로바이에른어]])가 워낙 심해서 '''목소리만''' 놓고 보면 별로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실제로는 연설 이전에 행해지는 다양한 효과들에 의해 히틀러의 연설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히틀러 본인도 제스처나 그런 것들을 연구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던 히틀러의 연설은 대부분 이런 행사들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정을 세심하게 설계해서 연설이 먹히게 하는 것도 재능이긴 재능이다. 한편 이 히틀러의 연설은, 전후 비 독일어권 사람들의 [[독일어]]에 대한 편견을 쌓는데 크게 기여했다. 히틀러의 연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게 되면서 자연히 히틀러의 억양과 발음 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어는 매우 딱딱하고 강한 발음의 언어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의 뉴스나 선전물 등을 접한 외국인들이 한국어가 딱딱하고 강한 어조를 가진 언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히틀러가 선동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레니 리펜슈탈]]이다.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제작자/감독으로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편집하여 배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혹자에 의하면 히틀러의 연설 자체는 지겹고 길고 두서가 없지만 리펜슈탈의 연출과 편집에 의해 일반 대중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공감이 가는 선동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